글귀
박준, 용산가는 길-청파동1
buttxr
2017. 5. 5. 23:01
청파동에서 그대는 햇빛만 못하다 나는 매일 병(病)을 얻었지만 이마가 더럽혀질 만큼 깊지는 않았다 신열도 오래되면 적막이 되었다 빛은 적막으로 드나들고 바람도 먼지도 나도 그 길을 따라 걸어나왔다 청파동에서 한 마장 정도 가면 불에 타 죽은 친구가 살던 집이 나오고 선지를 잘하는 식당이 있고 어린 아가씨가 약을 지어준다는 약방도 하나 있다 그러면 나는 친구를 죽인 사람을 찾아가 패(悖)를 좀 부리다 오고 싶기도 하고 잔술을 마실까 하는 마음도 들고 어린 아가씨의 흰 손에 맥이나 한번 잡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는 해를 따라서 돌아가던 중에는 그대가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대도 나를 떠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았다