글귀

한미영, 편백나무 숲에서 보낸 편지

buttxr 2018. 6. 6. 23:05

안녕 당신, 우리가 못 본 지도 한참 됐군요 난 지금 편백나무 울울한 숲에 와 있어요 편지를 받고 아직도 내가 그립거든 답장은 하지 마세요 나는 다만 욕망을 연기하는 신경증 환자처럼 기다릴 뿐이에요 이 곳 나무들은 팔을 치켜들거나 앞으로 뻗은 채로 배고픈 향기를 뿜어요 배가 고플수록 당신이 그리워요 당신은 입을 크게 벌린 나무사이로 포도주처럼 흘러내려요 새벽이면 늙고 주름진 슬픔이 부드러운 흙속에서 불쑥 솟아올라 나는 나무보다 더 새파랗게 기절하곤 해요 이곳에선 당신을 사티로스라고 부른답니다 사랑의 수정주의라 해두죠 한 집 건너마다 유령처럼 텅 빈 뉘앙스가 당신을 덮쳐요 팔을 늘어뜨리고 잠든 나무 위로 내 몸을 덮칠 수 있을까요 잠을 잃은 건 백년도 지났어요 피톤치드는 불면증 치료에 효과가 좋은 듯 해요 봉투에 봉함해서 보낼게요 사티로스 이만 안녕, 당신을 사랑해요 나도 라는 부족한 말로 답장은 하지마세요 나는 다만 끝없이 사라질 뿐이에요