사랑은 낡은 지갑과 같아서 길들인 흔적이

진할수록 조금씩 제 안이 패어간다

자주 꺼내 보다 보면 사랑은 그냥 습관이지만

가장 부대낀 날들 먼저 해져가다가

마침내 제 신분을 잊게 된다

사랑이 이처럼 떠돈다


사랑이 몇 올 실밥으로 계절을 누벼 간 후로

꽃이 덧나고 있다 반들거리는 저 면들은

누구의 손때일까 빈손이 집착의 공허라고 느낄 때

나무는 지퍼를 열고 그 이름을 꺼낸다

상처는 아픈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다

사랑이 이처럼 비리다


사랑에게서 한 시절 살다 온 사람은

증명사진을 함부로 빼놓지 않는다 지갑이

마지막까지 꺼내지 못하는 말은

나를 위해 나를 버릴 수 있을까 하는 위안,


어딘가 잃어버린 내가 주민번호를 외는 밤

분실물센터에서 고요하게 무릎을 껴안고

사랑이 이처럼 외롭다